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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5 오전 11:57:49 입력 뉴스 > 탐방

[탐방] 눈 속에서 잃어버린 길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5시에 출발 준비를 하다 칼에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칼을 쓰고 난 뒤 접어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혈이 되지 않았다. 움직여보니 큰 상처 같지는 않았지만 우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택시를 불러야할 만큼 위급한 상황은 아니어서 첫 버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쏴하고 한 줄기 소나기가 지나갔다. ‘다치지 않고 그대로 산행을 시작했더라면 비를 맞으며 고생께나 했겠지’라고 생각하는 내가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등산, 특히 혼자 하는 산행에서 사고는 가장 무서운 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주의란 놈과 어울리기만 하면 언제나 예고 없이 불쑥 덮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사고가 자기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교통사고는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쯤으로 생각하면서 자신만은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전문산악인들이 ‘나에게는 사고라는 불행이 있을 수 없다’는 의식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산행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이룩해 낸 수많은 등반의 위대한 업적들이 미완성으로 남지는 않았을까.


오만 가지 상념에 사로잡히면서 상처를 꼭 누르고 가만히 누워 있었더니 지혈이 되는 듯했다. 7시 20분 버스를 타고 운봉으로 나와 한양외과의원에 갔으나 의사가 출근하지 않아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8시 정각에 의사와 간호사가 와서 몇 바늘인가 꿰매고 난 의사는 “며칠 쉬는 것이 좋지만 그대로 등산을 계속해도 큰 지장은 없다”고 했다.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했다. 다친 다리를 이끌고 등산을 계속하기엔 우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일단 산내(山內) 쪽으로 가서 마천(馬川)이나 백무동에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쉬기로 작정했다. 산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실상사 앞에서 내렸다.



 

   

백두대간을짜른 88고속도

 

날씨 때문에 탑 사이로 천왕봉이야 볼 수 없겠지만 경내(境內)의 부도와 철불(鐵佛)이라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절에 들어가려니 입장료가 턱없이 비싸다. 경로세대라 입장료야 무료겠지만 남들이 비싼 입장료를 내는 것을 보니 꼭 들어가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어 발길을 돌렸다.

 

도로 건너편에 茶山房(다산방)이라는 이름표를 단 자그마한 전통찻집이 있기에 거기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려고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비구니 스님 일행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스님과 젊은이들이 어울려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좋았다. 차 맛도 괜찮아 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두어 시간 쉬었다.

 

언젠가 벽소령에서 하산하다 차편이 끊겨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는 지리산 여관이 생각나 마천으로 갔다.


여관 간판은 그대로인데 안으로 들어가니 집은 새로 지은 것 같았다. 일단 그곳에서 쉬면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날 오후는 비가 오다말다 했고, 둘째 날에는 비가 눈으로 변해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여관방에서 열린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이장선 목사가 쓴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땅에 쓰신 글씨사 2001년)와 <셜록 홈즈 이야기>라는 영문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에도 비나 눈이 계속내리면 산행을 중단하겠다는 생각으로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밖에 나오니 쾌청이었다.


 먼저 운봉의 한양외과의원에 가서 무릎 치료부터 하고 매요부락으로 향했다. 전날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등산 들머리에 도착한 것이 9시 05분이었다.


눈이 깊지도 않고 누구 한 사람 지나간 흔적도 없었다. 미끄럽지도 않아 걷기에 아주 편했다. 사람의 발자국 대신 선명하게 나 있는 멧돼지와 고라니 발자국이 나의 좋은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먹을 것을 찾아 밤새 마을 주변까지 내려왔다가 새벽에 올라간 듯했다.



 

   

유치삼거리

 

별 어려움 없이 10시 25분에 88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이실재에 도착했다. 쉴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 고속도로를 건너 잡목림 가운데로 난 산길로 바로 올랐다. 능선에 올라서니 앞이 확 트였다. 2~3년 전에 크게 산불이 난 듯 앞을 가리는 나무가 없었다.

 

사람이 적게 다녀서인지 억새풀이 이리저리 얽혀있는 데다 눈까지 쌓여 있어 걷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간간이 내 키 정도의 잡목이 눈을 이고 있어 일일이 털고 지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가자니 나무에서 떨어지는 눈이 등줄기로 들어와 귀찮았다. 자연히 산행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697고지를 올라서니 멀리서 한 사람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40대의 여인인 그녀도 나처럼 단독행이었다. 새맥이재에서 올라온다면서 서로 "조심해서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나누며 스치고 지나갔다.


백두대간을 시작한 후 지리산을 벗어난 다음 산에서 처음 만나는 도반이었지만 특별히 건낼 말이 없었다.


무엇을 묻고 대답하는 것이 귀찮아 아예 혼자나선 산행이 아니던가. 키가 별로 크지 않고 다부지게 생긴 그 도반도 그래서 혼자가 아니었을까 싶어 아예 말 걸기를 삼가 했다.


새맥이재를 넘어서니 다시 송림 사이로 뚫린 기분 좋은 길이 이어졌었다. 거기다 지금까지처럼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밟아 흔적을 남겨놓는 재미까지 있었다. 바람을 막아주고 눈까지 녹아 없어진 따뜻한 양지바른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미숫가루와 양갱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이대로라면 복성이재까지 4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시리봉 부근까지는 제대로 갔는데 묘지 부근에서 길을 잘못 들어버렸다(2006년 7월 6일 두 번째 종주 때 못한 구간을 확인 통과함). 오던 길을 왼(서)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데 북동쪽의 나무에 묶여 있는 허름한 빨간 베 조각만 믿고 그대로 나아갔다. 20여m 나아가니 내리막이 되면서 지난여름의 태풍으로 소나무가 넘어져 이리저리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리산 휴게소


적어도 수령 40〜50년은 넘을 듯한 소나무들이 뿌리 채 뽑혔는가 하면 가운데가 꺾여져 어지럽게 늘려 있었다.


다시 한번 태풍의 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산행 중에 이런 태풍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해졌다.


이렇게 무질서하게 넘어져 있는 나무를 타 넘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 아래로 겨우 빠져나가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으나 길은 계속 하산이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묘지 부근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쪽으로는 등산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도를 꺼내놓고 길을 확인하면서도 나침판을 꺼내 위치를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길을 잘못 든 줄 알면서도 조금 전 내려갔다 되돌아온 길로 다시 들어섰다. 얼마를 내려갔는지 임도와 마주쳤다. 그제야 지도와 나침판을 꺼내 확인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임도 주변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면 눈이 없는 곳은 질퍽거렸다.


비박할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식수가 있을법한 곳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북쪽의 아영면 청계리로 내려가 다시 시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서쪽으로 도로가 나 있었다. 그 길로 올라간다면 백두대간과 마주칠 것 같았지만 일단 청계리까지 내려가 비럭잠을 자기로 했다. 2시간 쯤 걸었더니 청계마을 초입에 닿았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노인부부가 감을 따고 있었다. 옛날 어릴 때 집안에 있던 감나무 생각이 떠올라 잠깐 감 따는 것을 지켜보았다.


감이 빨갛게 익는 이맘때면 동내 아이들은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감아 떨어져라 하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얼마를 그렇게 선채로 구경하다 “마을에 하룻밤 쉬어 갈 곳이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을회관의 경로당에 가보라고 했다.


길가의 마을회관에 가니 비어 있었다. 배낭을 안에 들여놓고 먼저 상점이 있는 아랫마을까지 내려갔다. 그동안 눈 때문에 산행하지 않고 먹어버린 김치를 사려했으나 파는 것이 없다면서 상점 주인이 자기들이 먹는 것을 나누어 주었다.


김치는 얻고 간식을 사서 마을로 돌아와 마을 노인회장을 찾았더니 저녁을 먹었느냐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마을 경로당에서 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회관에 내려갔으나 배낭만 있고 사람이 없어 방에 보일러만 틀어놓고 올라왔단다.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을 쉬게 해준 마을 인심에 감사할 뿐이었다.


◇산행메모 2002년 11월 7일(비) 07:20 매요부락 출발(버스), 08:00 병원에서 취료후 산내를거쳐 12:00 마천 지리산여관에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머물기로함. 8일(눈) 종일 독서하면서 하루를 보냄. 9일(맑음) 07:30 마천 출발(버스), 08:25 운봉도착(병원에서 다리치료), 08:55 운봉출발, 09:05 매요부락 등산로입구도착, 10:25 88고속도로 통과, 11:30 697m고지, 12:15 새맥이재, 13:15 시리봉주변 헬리포트 16:45 청계마을회관(1박)     <제휴사= 경북제일신보, 이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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