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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3-09-2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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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스키스톡 친구 삼아 고남산을 넘다

쉴새없이 달려온 인생길, 산 중턱에 홀로 서서 여유를 묻는건 어떨런지...

기사입력 2009-11-2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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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의 산행을 끝내고 10여일 지난 뒤라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에 컨디션은 최고였다.

 

더구나 전날이 음력으로 만65살의 생일이라 음력과 양력 어느 쪽으로 따져도 이날은 경로(敬老)세대가 된 후 처음 백두대간에 오르는 날이었다.

▲ 이종길

아침 5시에 일어나 배낭을 챙겨 30분 만에 집을 나섰다. 진주와 함양, 운봉을 거쳐 여원재에 도착한 것은 10시 25분.

 

버스정류소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들머리를 지나쳐 10여분을 허비한 다음 10시 40분에야 백두대간에 올라섰다.

마을을 둘러싸듯 소나무 숲으로 뒤덮인 나지막한 능선을 타는 산보(散步)처럼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여기다 북사면에는 잔설까지 있어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그런데 마을이 가까워서인지 백두대간 좌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마루금까지 묘지가 들어서 있었다.

 

마치 공동묘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듯했다. 묘지 대부분이 잘 손질된 것을 보면 후손들이 묘지의 음덕(陰德)으로 그런 대로 사는 것 같았다.

걷기 좋던 길이 갑자기 경사가 심한 내리막으로 변했다. 잔설이 있기는 해도 그렇게 미끄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그마한 계곡을 건너니 이번에는 된 오르막이었다.


20여 년 전 히말라야에서 쓰다 가져온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스키스톡이 오랜만에 제 역할을 하는 듯했다.

 

비박용 텐트의 지주로나 쓸까 하고 가지고 온 이 놈에 의지하여 오르니 한결 수월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데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 같았다.

   


능선에 올라서서 얼마 안 가 다시 오르막인데 주변의 소나무가 모두 불타 죽어 있었다.

 

불난지 얼마 안 되는 산불 현장에 서니 산불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땅에는 풀 한포기, 개미 한 마리 볼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불난 곳을 벗어나니 고남산이 건너다 보였다. 우뚝 선 두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어진 백두대간 마루금은 양쪽이 모두 급경사였다.

 

왼쪽이 더 심해 아랫자락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나무가 꽉 들어차 있어 그렇게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무가 없다면 어떨까하고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왔다.

 

거기다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 냉기까지 몰려오니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양지바른 따뜻한 곳이 있어 양갱과 우유로 점심을 대신하고 10여분 쉰 다음 길을 서둘렀다. 한참을 걷다보니 고남산 아랫자락에 붙어 있었다.

 

 지금까지 온 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며 버티고 있었다. 지도상의 암릉주의 지점이었다.


아랫자락에는 로프가 걸려 있어 어려움이 없었으나 위쪽이 문제였다.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홀드가 마땅찮은 데다 배낭까지 무거워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없어 바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피켈이었으면 웬만한 바위라도 피크로 걸어 당기는 등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스키스톡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5~6분간 고생 끝에 바위를 넘어 모롱이를 돌고 보니 고남산 정상이 바로 코앞이었다.

바위가 있어 험할 것 같던 정상에 오르고 보니 산불감시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달리 볼만한 것이 없는 정상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통과해 10여m 내려오니 산불감시초소에 있던 감시원이 놀란 듯 쳐다보았다.

 

갈증이 심해 물 한 컵을 얻어 마시고 아래쪽의 한국통신중계소를 향해 내려오니 능선의 북사면이라 그런지 중계소 주변에는 하얗게 눈이 남아 있었다.

철조망 옆으로 난 길에 쌓인 눈은 10cm정도였다. 질퍽거리기는 했으나 꽤나 오랜만에 밟아보는 산에서의 눈길이라 우선 반가웠다.

 

또 새 등산화의 기능을 체크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등산화는 물이 새지 않았고 안쪽이 고아텍스 처리된 특수 가죽은 물에 불지도 않았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등산로는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도로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면서 지도를 확인하니 매요부락까지는 빨리 걸어도 2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았다.

 

지리산 휴게소가 있는 이실재까지 가야할지 어떨지는 매요부락에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일단 일어섰다.

통안재 못 미쳐 도로가에 큰 느티나무 4그루가 있었다. 산불 감시원의 말대로라면 이 부근 어디에 샘이나 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물만 찾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 수통에 물을 채우지 않은 것이 잘못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매요부락까지 두어 시간 물이 먹고 싶어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통안재를 지나 조금 내려오니 왼편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사당이 있었다. 주변에는 낙엽송이 노랗게 물든 늦은 가을이 머물러 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성황당이나 산신당이 아니라 어느 돈 많은 집안의 제당인 듯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그곳에 가면 물이 있을 듯했지만 오가는데 필요한 10여 분의 시간이 아까워 사당을 무시하고 열심히 걸었다.

 

유치재에 내려서니 목도 마르고 어깨도 아파 배낭을 벗어 던지고 혹시 물이 있나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허사였다.

 

이렇게 물이 먹고 싶을 줄 알았으면 사당으로 내려가 물을 떠 올걸 하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지나간 버스 손들기였다.

   


유치재에서 다시 오르막이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지 걷는데 꽤 힘이 들었다.

 

30분도 안되는 거리였는데 1시간 넘게 걷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매요부락이 눈에 들어왔다. 백두대간은 왼편으로 마을을 감싸듯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띠지는 나를 마을 한복판으로 안내했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마을구판장이라면 마을 안 어딘가에 있겠거니 하고 교회가 있는 쪽으로 가니 마을 휴게실이란 간판이 보였다.

 

이런 산골에 무슨 휴게실인가 하고 갔더니 길가의 나무에 각종 띠지가 걸려있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였다.

 

승용차가 많지 않았던 수년 전만 해도 마을구판장이었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장사가 안되어 구판장 기능을 잃은 데다 산 꾼들이 자주 쉬어가니 이름을 아예 휴게실로 바꾼 듯했다.

마침 마을의 두 젊은이가 탁주를 마시면서 값이 비싸니 어쩌느니 하면서 주인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물이 하도 먹고 싶어 우선 갈증과 피로라도 풀고 보자고 포도즙 2캔을 먹고 나니 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맥주 1병까지 마시니 갈증은 물론 피로까지 확 가시는 듯했다.


시계는 4시를 조금 넘고 있었다. 이실재까지 갈까 어쩔까하고 한참 망설였다.

 

부지런히 걸으면 6시 전에 도착하기는 할 것 같은데 잠자리가 걱정이었다. 텐트가 있기는 했지만 추위를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다 가게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자면 된다면서 마을에서 자고 가기를 권했다. 일단 매요부락에서 쉬기로 하고 내일 아침 가야할 등산들머리의 확인에 나섰다.  

길 오른쪽의 초등학교는 폐교된 지 오래인 듯 운동장에 잡초가 무성하고, 교실에도 무엇인가 가득 쌓여 있었다.

 

폐교를 지나니 밭에서 단무지용 무를 뽑아다 길가에 쌓기에 바빴다. 계약 재배한 것으로 다음날 납품할 것이라고 했다. 등산 들머리는 얼마안가 나지막한 산 사이로 나 있었다.


휴게실로 돌아와 배낭을 경로당 마루에 놓아두고 노인회 회장이나 이장을 만나려고 했으나 아무도 만날 수 없어 마루에서 우선 저녁부터 해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끓여 진하게 한잔 마시고 나니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바동대며 살아온 세월의 덧없음이 새롭게 가슴에 와 닿았다.

경로당에 그대로 잘 수가 없어 휴게실 할머니에게 갔더니 경로당 관리를 한다는 할머니의 사촌 오빠에게서 허락을 받아주었다.

 

방에 짐을 들여놓고 있으니 마을의 젊은이가 와서 “난방이 되지 않아 어쩌겠느냐?”면서 걱정까지 해주었다.

 

여기를 거쳐 간 백두대간 종주 산악인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복장이 형형색색이듯이 성별과 나이가 다르고 나처럼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있었는가 하면 머리가 긴 사내,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 곰살궂게 보이는 얼굴인가 하면 우락부락하게 생긴 상판, 무엇엔 가 쫓기는 듯이 불안해 보이는 녀석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산은 과장과 위선, 거짓을 묻지 않는다. 신성한 산의 세계이니까 도덕적으로 선량한 사람들만 올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오산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지만 ‘악자입산(惡者入山)’도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산을 찾는 우리를 믿어주고 친절을 베풀어주는 마을사람들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처음에는 매트리스만 깔고 침낭을 펴놓고 보니 아무래도 방의 냉기가 거슬렸다. 그래서 이불장에 있는 담요를 꺼내 펴고 그 위에 펴놓은 침낭 속으로 들어가니 얼마안가 훈기가 돌았다. 다른 때 같으면 눕기만 하면 잠에 빠졌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따지고 보니 이날의 산행은 거리나 시간 모두가 너무나 짧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7시쯤에 눕기는 했지만 밖에 걸린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두서너 번 잠이 깬 다음에야 제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제휴사= 경북제일신보, 이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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