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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재발견] 『포은선생속집圃隱先生續集』은 우리나라에 왜 2책 밖에 없을까? (2)

남애경 본보 논설위원

기사입력 2026-08-0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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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앞서 7월 28일자 경북동부신문 영천문화유산의 재발견을 이어서 살펴보면
③ 세 번째로 목판의 훼손 및 인출(印出) 중단
조선 시대의 책판은 한 번 찍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판각(板刻)해 둔 목판을 서원이나 종가에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추가로 찍어내는 방식이다. 만약 1768년 간행 직후 목판이 바로 화재로 소실되었거나, 다른 이유로 추가 인쇄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면 후속 인출(인쇄)이 끊기면 초기에 찍어둔 극소수의 책만 세상에 남게 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인출(印出) 중단을 예상해 볼 수 있는 흔적을 포은속집의 문제점을 지적한 『포은선생속집변정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9판 총론 조에 수록된 글에서 속집 간행의 연원을 살펴볼 수 있다.
“此續集 本孫鄭翊贊之所辛勤裒集者 而歲在英廟戊子 本郡臨皐書院及開城崧陽書院 不謀而同時並刊 所謂崧陽本者 卽啓禧所編次讎校者也 所謂臨皐本者 癸酉年間梅山鳴臯兩鄭公 與其時洞主及一鄕諸父老 約會臨院 對同謄傳 藏之院中矣 至戊子春 本院長貳 乃與士林 始定刊行之議 告訖於己丑春 其間院儒之會議 不翅屢次 又齊籲本官及營門 請助資費 則郡守李侯商舟 出力優助 且給板材巡相李公溵 題給冊紙百束 此實官私之所並力共成者也.”
“이 속집(續集)은 본손(문중 후손) 정익찬(鄭翊贊)이 고생스럽게 모으고 수집한 것인데, 영조 무자년(1768년)에 본 고을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및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서로가 약속하지도 않았는데도 동시에 함께 간행하였다.
이른바 ‘숭양본(숭양서원 판본)’이라는 것은 곧 홍계희(洪啓禧)가 편차(편집)하고 수교(교정)한 것이다.
이른바 ‘임고본(임고서원 판본)’이라는 것은 계유년(1753년)간에 매산(梅山, 정중기)과 명고(鳴臯, 정간) 두 정공(鄭公)이 그 당시의 동주(洞主) 및 온 고을의 여러 부로(어른)들과 함께 임고서원과 약속하고, 서로 함께 베껴 전하여 서원 속에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무자년(1768년) 봄에 이르러 본 서원의 장의와 유사(원장과 차석 등 서원 임원들)가 이에 사림(士林)과 더불어 비로소 간행하자는 의논을 결정하고, 기축년(1769년) 봄에 보고하여 끝마쳤다.
그사이에 서원 유생들의 회의가 비단 여러 번뿐만이 아니었으며, 또 본 고을(영천군) 및 영문(경상감영)에 일제히 호소하여 자재와 비용을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군수 이상주(李商舟. 1767~1769년 재임한 영천군수)가 힘을 내어 넉넉히 돕고 또 판재(책을 찍을 나무판)를 주었다.
관찰사(순상) 이은(李溵1767~1769년 재임한 영천군수)은 책을 찍을 종이[冊紙] 100묶음을 결재하여 주었으니, 이것은 실로 관(관가)과 사(민간/서원)가 힘을 합쳐 함께 이룩한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보듯이 《포은선생속집》은 많은 민관(民官)과 임고서원이 힘을 합치고 영천군수와 관찰사가 힘을 보탠 상당한 공력을 기우려 만든 책이다. 
그런데 1719년 속록과 1768년 속집의 간행되면서 정몽주 사후 약 230년간(초간본~8차 간행) 《포은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단심가가 나타난 것이다. 17세기 초 심광세의 《해동악부》에 처음 실린 뒤, 1719년(숙종 45년) 후손 정찬휘가 엮은 《포은집 속록》에 편입되고 영천의 《포은선생속집》에 수록되면서 문집에 공식 등재되었다.
1719년 속록과 1768년 속집을 거치며 단심가 등 후대 가탁(假託) · 위작 의심 자료들이 대거 문집에 수록되자, 사림과 가문 내에서는 “단심가는 후대의 위작이거나 원작이 아닐 수 있다”는 문헌학적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를 검토하고 문집의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편찬된 별도의 고증록이 바로 《속집변정록》으로 보인다.
이 단심가의 연구는 현대 여러 학자들의 연구로 제기되었는데 ①홍순석, 강남대 국문과 교수(한국한문학전공).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 연구(2014). ②강전섭,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단심가와 (丹心歌) 하여가의 (何如歌) 소원적 (遡源的) 연구. ③ 박성수, 세계평화교수협의회. 丹心歌의 원작자는 백제의 여인 韓珠(1894) 등 여러 논문에서 연구되어 왔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과 충절을 상징하는 절대적인 상징물이었던 것이 정통성 인식에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일대 유림(특히 기호 유림 및 관학파)의 거센 역풍과 반발에 발간 직후부터 위험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1768년작 《포은선생속집》이 귀해진 진짜 이유는 유림 내에서 거부당하고 인위적으로 도태 ·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임고서원에 1667년 정본인 영천군수 이만봉의 주관으로 간행된 《포은선생문집》 판목(113판)은 고스란히 남아있으나, 100년 뒤인 1768년에 간행된 《포은선생속집》의 판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서지학적 기록과 유물 현황을 볼 때 매우 기이한 일이다. 영천역사박물관의 소장본 포은속집이 간행지(刊行地)이자 간행 주체인 오천정씨 문중 혹은 영천 지역 유림과 임고서원에서 유래된 ‘원소장처 계열’의 전래본으로 깊은 골방이나 벽 속에 비장(秘藏)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눈물의 생존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cdi (cdi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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