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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8-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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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

양 삼 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문화대학원 교수 풍수지리학 박사

기사입력 2026-08-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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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로, 본관은 여산 송씨이며 좌의정을 지낸 송현수의 딸이다. 1454년 어린 나이로 왕위에 있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숙부인 세조(수양대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그녀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곧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 역시 왕비의 지위에서 쫓겨나 ‘노산군 부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을 떠나야 했다. 이후 1457년 단종이 끝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정순왕후는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평생을 절의와 고독 속에 살았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도 재가하지 않은 채 단종에 대한 정절을 지키며 은거하였고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난 삶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왕비의 신분을 빼앗기고 세조의 도움도 거절한 채 염색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그녀는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전해진다. 이후 세조에서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단종 복위 사건이 몇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 그녀의 신분은 회복되지 못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속에서 잊힌 존재처럼 살아야 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의 집안 묘역에 안장되었고, 후손이 없다 보니 제사도 해주 정씨 집안에서 지냈다고 전한다. 훗날 단종이 복권되고 정순왕후의 지위가 회복된 것은 1698년(숙종 24)이었다. 이때부터 단종의 묘는 장릉으로, 정순왕후의 묘는 사릉으로 격상시키고 왕릉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사릉(思陵)이란 능호는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워한 데서 나온 이름인데 혼자 떨어져서 남편을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가 1698년 정순왕후로 복위되면서 원래 왕릉 주변의 무덤들은 전부 이장하는 것이 원칙이라 사릉 주변에 있던 해주 정씨 묘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그대로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권력의 다툼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왕비이자 끝까지 남편에 대한 지조와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며, 조선 왕실사에서 가장 애틋하고도 상징적인 여성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인 포천시 화현면의 운악산(936m)과 군내면의 수원산(709.7m) 사이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가평군의 주금산(814m)을 지나 남양주시 오남읍의 천마산(812m)에 이른다. 사릉은 천마산서 다시 남서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와 진건읍의 관음봉(550m)과 호평동의 된봉(430m)을 거쳐 묘역 뒤편에서 150m의 봉우리를 일으켜 현무봉을 만들고 그 끝자락에 남향으로 모셔져 있다. 이 묘역은 현무봉과의 거리감이 있어 뒤편이 낮은 관계로 겨울의 차가운 북서풍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좌우 청룡·백호도 낮아 장풍국이 되어주지를 못한다. 그러나 수세는 다행히 동출서류로 흐르는 사릉천이 묘역을 감싸주면서 흘러 생기 보전에 도움이 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풍수적 명당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다.

cdi (cdi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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