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8-26 10:58

  • 오피니언 > 칼럼/사설

[데스크칼럼] 세이렌의 교훈, 지방선거 승리자가 가야할 길

최병식 편집국장

기사입력 2026-08-26 10:47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학창 시절, 거창한 야망을 품고 책장을 넘겼다가 첫 장부터 좌절을 맛 본 책이 있습니다. 요즘 공전의 히트라는 영화 ‘오디세이’의 원작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입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복잡한 이름과 현실 감각 없는 신화 속 이야기들은 청년기의 호기심을 짓눌렀습니다. 중간쯤 읽다 보면 ‘문학책을 읽는가, 족보를 외우는가’ 하는 자괴감 속에 책을 덮기 일쑤였습니다. 그랬던 그 통곡의 벽이 시간과 차원을 주무르는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스크린을 타고 재조명받듯, 고전은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 삶 가까이로 들어옵니다. 
얼마 전 일련의 사회적 논란을 거치며 자주 눈에 띤 스타벅스 로고의 주인이 바로 고전 속 괴물 ‘세이렌’입니다. 치명적인 노래로 항해사를 홀려 바다에 빠뜨리던 세이렌은 오늘날 우리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상업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몸을 묶고 귀를 막아 유혹을 견뎠지만, 요즘의 우리는 애석하게도 세이렌이 뿜어내는 아메리카노 향에 취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카드를 건넵니다.
그러나 세이렌을 관능적 유혹으로만 읽는다면 원전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대가 트로이에서 이룬 모든 일을 알고 있노라.” 고전 속 세이렌의 노래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 섬에 뱃사람의 뼈가 쌓인 진짜 이유는 미지의 쾌락이 아니라 지나간 승리의 기억입니다. 사람을 난파시키는 가장 달콤한 소리는 언제나 ‘한때 옳았던 자기 자신’에 대한 찬가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울리는 노래도 그렇습니다. 전부 과거형입니다. 공천권을 나누고 진영을 결집할 때 부르던 그 과거의 노래를, 당선 이후의 주변에서 누가 부르는가요. 지역이 무너지든 사회가 망가지든 이를 개의치 않고 오직 자파의 세력 복원에만 매달리는 정치가 가장 나쁜 정치입니다.
다시 오디세우스 여정을 되짚어 봅니다. 거대한 목마를 설계해 10년의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영웅 오디세우스는 서사시 속에서 그 승리를 결코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계략이 지혜로운 진보가 아니라 잔혹한 탐욕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되뇌며 지독하게 괴로워합니다. 이긴 자가 자신의 자만과 과거를 의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숙한 자세입니다. 서사시의 마지막도 피비린내 나는 복수가 아닙니다. 귀향후 집안을 어지럽히던 100여명에 달하는 구혼자들을 몰살한 뒤 유족들이 창을 들고 몰려오자 신들이 개입하여 ‘지난 일을 잊고 화평하라’고 명합니다. 20년의 유랑과 하루의 학살 끝에 위대한 시인이 남긴 결론은 하나입니다. 피의 되갚음과 진영의 논리로는 단 하나의 미래도, 그 무엇도 세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기억’에 의존하는 보복의 정치가 이제는 ‘기대’를 품게하는 민생 정치로 변해야 할 때입니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단체장과 의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영의 복원’이 아니라 ‘성과의 축적’입니다. 이겼던 과거의 선거 공식이나 세력 결집 방식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을 위해 실제로 ‘무엇을 해냈는지’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논공행상하고, 지난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데 임기 초반의 소중한 동력을 쏟아붓는 것은 세이렌의 노래에 홀려 배를 바위에 부딪는 자해 행위입니다.
오디세우스가 고난 끝에 돌아간 곳은 그가 떠나온 20년 전의 이타카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세월이 흐르고 사람과 풍경이 변한 새로운 공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재건하려는 과거의 그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은 이미 없습니다. 인구 감소에 지역 해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 서 있는 정치인에게 승리의 기억은 가장 달콤한 독약입니다. 새로 시작한 정치인들은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고, 오직 내일의 지역 발전을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영광스러웠던 어제의 승전가를 잊고 냉정한 현실의 바다로 노를 저어가는 것만이 유권자의 선택에 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cdi (cdinews@nate.com)

  • 등록된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댓글0

스팸방지코드
0/500